
어떤 사랑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끝을 맺는다.
습기가 내려앉아 공기가 눅진한 초여름이었다. 제이는 요즘 아르티옴이 못마땅했다. 좋아하는 듯 아닌 듯, 애매하게 굴어서 자신을 자꾸 헷갈리게만 했다. 그래서 그를 불러낼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사랑을 시작하게 만들기 위해서.
주말, 늦은 시간. 제이는 아르티옴을 아무도 없는 학교로 불러냈다. 경비의 눈을 피해 잠긴 문을 뛰어넘고, 복도의 캐비닛 앞에 아르티옴을 두고 팔을 기댄 채, 점차 고개를 밀어 서로의 안면이 가까워지게끔 하고 있었다.
아르티옴, 네가 나한테 조금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는데에. 나만 이렇게 만들어놓고 책임은 없다 이거지이. 예의 길게 늘이는 말투로 유독 더 능글맞게 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마 고작해야 아르티옴이 그의 몸을 밀쳐내는 것일 테지. 일촉즉발의 상황, 제이는 한 마디 더 나긋하게 속삭였다.
언젠가 나한테만 들려줘, 네 기타 연주.
그가 만든 그늘의 폭이 점차 좁아지며 제이는 그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 순간,
탕! -
어떤 총성은 경기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은 순식간에 살벌히도 울려퍼져 두 사람의 키스를 종결시켰다.
제이의 결박은 풀어졌고, 아르티옴은 고개를 돌렸다.
이내 비명소리가 이어졌고, 정문으로 서둘러 나가는 순간 두 사람은 발견했다.
처음에는 길바닥에 드러누운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제 팔을 움키고 있는 경비를,
그 다음에는 그 앞에 관절이 비틀린 채 흉물스러운 걸음으로 멀어지고 있는 -
영화 속에서나 본 좀비같은 것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제이가 먼저 아르티옴의 팔을 세게 쥐었다.
이번에는 입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디로든 향해야 했다.
어떤 사랑은 정말, 시작되려는 찰나에 끝이 나고 만다.
어느 최악의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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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그 날 본 좀비가 정말 분장을 한 배우였고, 두 사람의 로맨스를 방해할 장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현실은 세트 따위가 아니다. 이런 해프닝이 그들을 위해 급조된 시나리오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들 또한 무엇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기사 이런 상황에 태연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은 애당초 없을 듯하다. 하루아침에 터진 일명'좀비 바이러스'는 전개의 흐름이란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기하급수적으로 번져가며 빠르게 인류를 옥죄어 왔다.
'좀비'로 불리는 감염자들은 온갖 곳에서 튀어나왔고, 현대화된 군대도, 의학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은신해야만 했다. 사흘. 좀비에게 물리면 단 사흘 안에 좀비로 변하게 된다고 한다.
바이러스가 터진 지 약 일 주일이 지난 지금, 제이와 아르티옴은 여전히 교내에서 함께 다니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가족 혹은 지인에게 연락해보았으나 그나마 학교 인근이 가장 사정이 나았다. 지금까지도 두 사람은 경비를 공격한 좀비를 제외하고 서넛밖에 발견하지 못했으나, 수화기 너머에선 온갖 비명소리가 난무했으니까.
주거촌은 사람 수 만큼이나 빠르게 정복당한 모양이었다. 이틀이 지나자 전화는 잘 연결되지도 않았고, 사흘이 지나자 메시지 도착 알림음으로 요란했던 제이의 휴대폰도 방전되어 잠잠해졌다. 아르티옴의 휴대폰으로 확인해 보았지만 비슷한 시점에 통신이 불가하게 된 것 같았다. 나흘째 되는 날, 그들은 총격전이 일어났던 학교 후문 쪽에서 경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총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경비는 어디로 간 걸까. 알 수 없다.
아르티옴이 어디든 돌아가보자고 했지만, 제이가 거절했다.
몸 건사하려면 여기가 가장 안전해. 일단 살아남아야지이. 안 그래, 아르티옴?
안 그래. 그런 말은 생각만 했다. 이렇게 피해 살기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제이, 녀석과만 함께 지낸다면 저 녀석이 떠나거나, 좀비 비슷한 게 되어버렸을 때의 대책이란 게 없다. 한 명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싫다. 외톨이의 삶을 살아왔대도.
하지만 혼자 학교를 벗어나기엔 역시 저 철부지 금발이 신경 쓰였다. 바보같고 뺀질하기만 해서, 좀비가 덤벼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멋대로 덤벼들 지도 모른다. 그럼, 젠장, 내가 저 자식을 방관한 꼴이 되겠지.
그런 경위로 아르티옴은 곁에 있기로 했으나, 여전히 제이에게 불만을 품은 상태였다.
시위라도 하듯 구태여 등을 돌려 눕고 있는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이리라. 이곳은 운동장 외곽에 위치한 체육 창고. 일주일 내내 그들의 든든한 숙소 역할을 해 준 곳이다. 그들은 낮에는 교내를 돌아다니고 학생식당의 식료품 창고에서 음식을 꺼내먹으며 재난 속 태풍의 눈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제이는 퍽 여유롭게 농구공 하나를 팔에 안은 채 베개 삼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미끄러져 잘 되지 않았지만 예컨대 이 정도가 어딘가.
텅 빈 학교는 언제나 둘 나름의 안전지대였다. 좀비 몇 마리가 돌아다니던 정문 쪽과는 달리, 창고 주위에는 늘 개미 한 마리조차 지나지 않았다. 이 시간에는 별 달리 말이 오가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지금도 침묵 뿐이었다.
실은 이런 일과가 며칠 째 이어져 왔다. 잘 먹지 못해 지친 몸을 대충 널부러뜨리고, 서로가 언제 잠든지도 모른 채 잠에 들고, 먼저 일어난 쪽이 말 없이 상대를 기다리는 것.
하지만 오늘, 두 사람이 막 깊은 잠에 빠져들 무렵, 누군가 밖에서 창고의 철문을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
다급하고 선명한 소리였다. 아르티옴이 먼저 상체를 일으켰다.
사람인가? 누군가 학교까지 와서 이 곳에 은신하려고 한 걸까?
이런 상황에서 큰 소리가 긍정적인 역할을 할 리가 없었다. 원인이 뭐든 빨리 잠재워야 했다.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팔에 익숙한 손의 체온이 얹어졌다.
언제 일어났는지, 여전히 드러누운 채로 고개만 아르티옴 쪽으로 향한 제이는 나긋하게 하지만 분명히 말했다.
"안 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에."
가벼운 농담조였지만 음성은 제법 심각했다.
"시끄럽잖아..."
"새벽에 이렇게 미친듯이 두드리는 거면 뭔 일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제이는 저와 다르게 방관에 익숙하다. 그래서 재수가 좀 없다.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더더욱,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채로 찜찜하게 잠에 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르티옴이 보기에 제이, 그는 정말로 지나치게 천연덕스럽고 태평하다.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근성도.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적성이 풀리고, 그래서 저는 늘 양보만 해야 하지. 그를 방관하기 싫어 떠나지 않았는데 남을 방관하라는 말까지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르티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새 노크 소리는 더 커져 있었다. 철 부딪히는 소리가 살벌하게 창고 안을 울려 소름이 다 끼쳤다.
"...야, 거기, 뭐야."
아르티옴이 그리 말하며 문 가까이에 진입한 순간이었다.
쾅!
파열음과 함께 철문이 번쩍 열려 버렸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며칠 전, 그들 앞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괴성을 질렀던 경비는, 이제 더는 인간이라 칭할 수 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제이의 낮은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뭐해, 아르티옴, 빨리 밀쳐서 내보내."
밀치라고? 좀비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건 초유의 사태였다. 생각보다도 악취가 났으며, 흉물스러웠다.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사이 경비 좀비는 느린 걸음으로 창고 안쪽으로 더 진입해 왔다. 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었을 때의 모습이 선명한데, 아무렇게나 건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씨발, 그냥 좀…“
말을 들을 리가 없는데 아르티옴도 괜히 한 마디 해 본다. 경비 좀비는 가까워져 온다… 한 팔을 들어 막 아르티옴의 목을 움키려 든다. 아르티옴이 눈을 질끈 감고 나서 얼마 안 돼,…
퍽, 통, 통.
웬 마찰음이 들린다. 농구공이 바닥을 긁는 새된 소리가 창고를 울린다. 눈을 떠 보면 제이가 던진 농구공이 그의 팔을 명중한 듯 하다.
주춤거리던 경비 좀비가 우울하고 낮은 울음소리를 낸다. 지체할 새도 없이, 제이는 구석에 서 있던 삽을 들고 좀비의 머리를 가격한다. 힘이 충분히 실렸는지 과격한 몸짓, 진액같은 것들이 흘러나오며 이곳저곳에 불결하게 튄다. 순식간에 좀비는 꿈틀거리며 바닥에 엎어지고, 제이가 아르티옴쪽을 무표정한 얼굴로 몇 초 응시한다. 금세 풀어지더니 삽을 내민다.
“아르티옴~ 쫄보 아니야? 덕분에 우리 둘 다 큰일날 뻔 했네에.”
“…별… 그냥 내키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삽은 왜."
”그래도 내가 끝까지 처리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아. 또 있을 일인데 익숙해져야지이.“
“…싫어. 또 있든 말든 알 게 뭐야. 그때도 안 건들 거고, 지금도…“
제이가 고개를 젓는다.
“나보단 네가 더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에.
야, 이건 너한테 평소처럼 놀자고 권유하는 게 아니야. 너, 살고 싶은 건 맞아?”
“안 어울리게 웬 연설이야, 연설은…“
항시 자기 말에 일체의 의심도 없는 제이의 확고한 말투가 늘 시원스럽고 퍽 마음에 들었으나 지금은 염증이 인다. 이 사이에도 좀비는 보기 흉하게 관절을 뒤틀며 괴상망측하게 신음한다.
”좀, 현실적으로 굴라고. 답답하게 하지 마. 할 건 해야지이.“
”너, 꼭 이럴 필욘 없잖아. 이제 내보내기만 하면 돼.“
”혹시 모르지이. 다시 달려들 수도 있잖아.“
”반쯤 죽여 놓고 뭔 소리야.“
”영화도 안 봤냐. 좀비는 잘 안 죽어.“
좀비는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에만 등장해 왔으니까.
제이 얼굴에 서렸던 웃음기가 점차 사그라든다. 알던 제이 같지가 않다. 매번 실 없이 구는 녀석이었는데.
“안 해, 씨발…”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에게 말릴 것만 같다. 그렇지만 싫은 것을 어떡하리. 아르티옴은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슬금슬금 뒤로 걷더니 기운이 빠져 벽에 기댄 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가신 자식. 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삽으로 몇 번 더 좀비의 머리를 내려친 뒤,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돌렸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저라고 좋아서 이러는지.
아르티옴은 자꾸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제이는 생각한다. 그가 돌아기고 싶은 곳은 아무런 위험이 없는 과거겠지, 정말 집을 뜻하는 건 아닐 테다. 죄다 부식되어 훼손된 집에 돌아가 기분 상할 것을 상상하면 싫었다.
그래서 최소한 제가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없는 것을 그리워하고 그 실체를 바라본 뒤,
삶의 의지가 꺾이는 대신 저와 같이 살아 있기를 바랐는데.
이 속좁은 자식은 좀비 하나 잡는 것조차 의기소침하게 군다.
좀비는 살리고 싶고 스스로는 관심 없는 건가.
그런 것이라면 어리석다.
좀비는 살리고 싶고 나, 제이는 어찌 되든 상관이 없는 건가.
그런 것이라면 속상하다.
아르티옴은 소극적이다. 비단 좀비를 때려잡는 일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부르면 오고, 같이 있어 달라면 있어 주고, 심지어는 며칠 전처럼 입맞추려 해도 반항 않지만 제대로 한 번 좋다고 하는 일이 없다. 꼭 자신만이 그를 범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저처럼 여자애들이랑 시시덕거리는 것을 즐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저 외의 다른 남자애랑 붙어있는 꼴도 못 봤으니 분명 자신은 다른 이들과 다른 영역에 속한 것 같긴 한데,
그런 것 같기는 한데, 그 영역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르티옴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일까. 아르티옴을 볼 때마다 느끼고 싶은, 지키고 싶은 어떤 기분을 아르티옴은 느껴본 적 없는 걸까?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듯하다.
제이는 숨을 고르는 아르티옴의 어깨에 말 없이 손을 올린다.
다시금 얼굴 근육에 힘을 준다. 기운 빠진 채로 녀석을 대하긴 싫다. 그것은 완전한 패배선언이나 다름없으므로.
“약해빠졌네, 아르티옴~.”
“됐어…“
숨소리에 섞인 가라앉은 음성.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던 제이의 노력이 순식간에 무색해지는 마법과도 같은 음성이다. 괜찮다고 할까, 앞으로 너를 위해서 좀비쯤은 다 잡아줄 테니 있기만 해달라고 할까, 혹은 자신도 끔찍했으니 손이라도 잡아 달라고 할까. 풋내기 같은 생각을 하다가 속으로 전부 무슨 소용이니 싶었던 제이는 삽을 지익 끌어 문을 열고 경비 좀비를 밖으로 밀어냈다. 확실히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동도 없는 걸 보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했다. 이 인근이 소란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른 곳에서 이 정도 소동이었다면 다른 좀비들이 떼로 몰려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한 제이는 한 마디 칭찬이라도 기대하며 아르티옴 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여보였으나 아르티옴은 여전히 지친 얼굴이었다.
“야, 제이.”
“왜 부르지이.“
”내일이라도 찢어지는 게 낫겠어… 네 말대로 이런 일은 또 있을 지도 모르고, 난 그때마다 싫다고 말할 테니까.“
그러니까 아르티옴은 도저히 하나라도 양보하는 법이 없다. 이제는 어떻게 인내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이 상한 것이 역력한 얼굴로 제이는 묻는다.
”나랑 싸우는 게 싫어서 나랑 있기도 싫어?“
”…너랑 싸우지 않으려면 그런 수 밖에 없잖아. 그리고… 돌아가고 싶다고.“
”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데, 아르티옴.“
제이 입장에서 네가 돌아가고 싶다는 협소한 공간과 저가 즐기던 과거는 차원이 다르다. 기념일이면 러브레터로 가득한 캐비넷, 충전기와 떨어져 있으면 몇 시간 안 가 방전될 정도로 울려대는 메시지 알림, 밤마다 즐기던 이름도 가물한 녀석의 저택에서 열려대는 파티에서 아무렇게나 취해 기분 좋게 누군가의 뺨을 어루만지던 일. 좀체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아르티옴의 일상은 훨씬 고루하고 지루할 텐데도, 그는 왜 자꾸 자신이 아닌 곳으로 도망치려 하나.
"네 옆에 나는 아무 소용도 아닌가."
제법 차가운 제이의 음성에 아르티옴이 움찔한다. 더는 실랑이하기 싫다는 듯, 아르티옴이 한 손을 들어 백기를 흔들어 보인다. 하지만 제이의 빈정은 이미 상할대로 상한 상태였다. 그 날, 제이는 농구공도 안지 않고 대충 잠에 들었다. 아르티옴은 오랫동안 잠에 들지 못하고 제이의 팔 사이에 제 몸을 욱여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보 같은 녀석에게 끌리는 자신이 더 바보 같다. 그래서 더더욱 떠나야 했다. 돌아가기 위해서.
새들은 아침마다 여전히 운다. 그들은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운 것인지. 창고에서 눈을 떴는데 유독 서늘함이 느껴져 즉시 상체를 일으킨 제이는 주변을 둘러보고 몇 초도 안 돼 정말로 아르티옴이 떠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리나케 문을 열었지만 운동장 등에는 보이지 않았고, 그는 다시 들어가 삽 하나만을 챙긴 채 정문 앞으로 달려가
"아르티옴 ㅡ "
하고 이름을 외쳤다. 어젯 밤 노크 소리를 외면하라고 했던 남자 답다. 안전불감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좀비 따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였다. 실제로 좀비 몇 마리가 즉각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련하게 굴던 자식이 이제는 멋대로 떠나서 자신을 이런 시련에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그리고 빌어먹을 자식이 벌써 그립다는 생각에 입술에 짭잘함이 느껴졌다. 설마. 그럴 리가. 땡볕이니 열이 받아 땀이 나는 걸 테다. 마지막으로 눈물흘렸던 때가 언제였지? 공포 탓은 아니다. 아르티옴처럼 쫄보라 좀비들을 공격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아, 이것은 또 다른 최악의 시나리오다. 아르티옴은 바보 같이 소극적으로 굴 텐데. 몸은 건사하고 있을까? 이제는 며칠 전 아르티옴에게 키스하려던 때와 유사할 정도로 가까워진 좀비들을 외면할 수가 없다.
삽을 들고 휘두른다.
야, 정말로 어디에 간 거야?
가라고 진짜 가는 게 어딨냐?
대낮에 눈 앞에서 마주하는 좀비는 훨씬 더 흉악하게 일그러진 형상을 하고 있다.
아르티옴 자식이 밍기적거렸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저는 반대의 상황이었더라면 아르티옴을 제 뒤에 두고 지금처럼 삽을 휘둘렀을 테지만. 다시 말하지만 저도 이런 살육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르티옴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듯... 자신도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믿는다. 전과 같은 일상으로.다시 캐비닛 앞에 서서, 묻고 싶다. 이제 다 끝났는데. 또 도망칠 거야. 아르티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알고 싶은데에. 알려주면 안 될까.
배은망덕한 아르티옴. 그 때였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제이를 향해 좀비가 달려들었다. 저돌적으로 곧 죽어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제이는 빠르게 다시 한 번 삽을 휘둘렀지만, 팔에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마침내 좀비가 고꾸라지고 제이도 들고 있는 삽을 내렸다. 팔에 힘이 빠져 지익 하고 끄는 소리가 났다. 모래와 점액이 사정없이 묻은 삽을 땅에 떨어뜨려 두고, 제 팔을 살폈다. 짓물러 피가 흐르고 있었다. 통증만이 느껴져, 그는 이를 악물고 잠시 주저앉았다. 날은 여전히 뜨거웠다.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된 제이는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사태가 발발하고 꾸준히 날씨는 지독하리만큼 밝고 따뜻하다.
한참을 그리 서 있다 살펴본 팔에는 잇자국이 선명하다.
최악의 시나리오 ㅡ 그렇다면,
사흘. 단 사흘이 남았다.
그 안에 아르티옴에게 묻고 싶은 것이 남았다.
고개를 숙이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마냥 서 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디론가 향해야 했다.
다행히 그는 아르티옴이 어디로 갔을 지 알고 있었다.
한편 아르티옴은 멀리 가지 않은 채였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기로서니 밤 사이 좀비들이 드글거리는 주거촌 쪽으로 향하는 것은 자살꼴이나 다름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교내에 숨어 있으며 며칠 아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챙기고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그는 제이가 학교 내부부터 둘러 볼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실제로 그것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은 후에나 알게 되리라. 애시당초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니 제이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집. 하지만 아르티옴은 그가 찾아오지 않길 바랐다. 그는 살아남는 데에만 급급해 돌아갈 곳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좀비 몇 마리 때려잡으라고 성화를… 그들도 한 때는 사람이었을 텐데 죄책감이라곤 없는 듯했다. 아르티옴은 기왕이면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막 아침이 되어 나온 거리는 침울하리만큼 조용했다. 일이 터진 이후로 학교를 벗어난 것도, 제이 자식 없이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문득 좀비를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제이랑 있으면 그가 처리해줬을 텐데. 차라리 같이 가자고 더 설득해 볼 것을 그랬다. 아무리 변했기로서니 좀비들은 두 발로 걸었다. 꼭 자신처럼. 그런 녀석들을 죽이는 것은 찝찝하고 소름이 끼쳤다.
주거촌 주변에 도착하자 거리는 아수라장이었다. 번쩍거리는 빛을 자랑해 신경 거슬릴 정도로 눈이 부셨다고 생각했던 바의 간판은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사람들이 가득했던 음식점의 벽은 허물어져 철골이 다 보였다. 이 곳에서 멀쩡하게 몸을 건사하고 있는 것은 꼭 아르티옴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람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숨어들어간 것인지. 혹은 죽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거리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좀비들이 후각에 의존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시체를 뜯어먹는 꼴을 몇 번씩이나 목격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살점들이 떨어져 짓이긴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걸음을 옮기다 종종 들르던 음식점의 주차장 입구 쪽에 주저앉았다. 허기도 지고, 해가 강렬한 탓에 체력이 금방 달렸다.
하지만 잠시의 휴식도 아르티옴에겐 허용되지 않았다. 분명 찾을 때는 없었던 사람이 이럴 때 나타났다. 햇빛을 가리는 그림자의 정체는 장신의 두 사람이었다. 악취가 나고, 얼굴에 마른 피가 맺혀 있는 그들은 거의 좀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남부 사투리가 섞인 말씨로-
”보송해보이는 녀석, 먹을 게 있으면 내놔.“
라고 했다. 한 쪽이 총을 꺼내 들었다. 긴장감이 느껴질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았다. 눈 앞에서 좀비를 때려잡는 모습을 목격한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채였기 때문일까. 그보다 보송해보인다니. 태어나서 처음 듣는 평가다. 아마 훨씬 많은 생과 사의 갈림길을 겪었을 그들은 더 너절한 꼴을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표현 같다. 솔직히 조금 웃기다고까지 생각했다.
”없어. 그런 거.“
주머니 속에 있어 멍청아. 근데 별로 줄 생각 없다.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자식이… 이 근방에서 돌아다니는 건 너 밖에 없어. 다른 곳에 있다 온 거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잘 먹고 지냈다는 건데. 없을 리가 없지.”
아주 멍청한 건달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데?”
집에 도착해서도 누구도 만나지 못하면 골치가 아프다. 괜히 캐묻는다.
“묻는 말에나 답해, 며칠동안 음식 구경도 못 했어.”
“집에 먹을 것 들 없어?“
”이미 다 빼앗기거나 먹을 수 없는 상태야. 아니면 젠장,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알려줘.“
총을 들고 있던 쪽이 그것을 거뒀다. 죽기 직전이라 날카로워지긴 했어도 실제로 아주 나쁜 녀석들은 아니었나 보다. 애초에 말투에서도 협박보다는 간절한 티가 났다. 아르티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명은 몰라도 두 사람 정도라면 학교로 보내도 제이랑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 타는 녀석이고. 어차피 학교의 식량은 두 사람이 먹기엔 지나치게 넉넉했으니까.
”고등학교로 가.“
”뭐? 너 그 쪽에서 온 거야? 가는 길에 좀비떼가 드글거리던데.“
”내가 여기까지 올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어.“
하긴 이상했다. 운이 좋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아르티옴은 모르겠지. 제이가 자신의 이름을 온통 불러댄 턱에 운동장으로 이목이 모두 끌려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절반 쯤의 확률로 좀비가 될 수도 있는 제이가 이 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 거긴 먹을 게 많냐?”
“학생식당 냉장고가 아직 작동 돼. 거기서 거기지만 양으로 따지면 많아.”
예사라면 퉁명스레 흘려들었을 아르티옴은 두 사람 말에 꽤나 성실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좀비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던 제이의 말에 반해 사람을 살리려고 하고 있는 제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어쩐지, 제이는 자꾸만 거부하고 싶었다. 철 없고, 명랑하고, 자신과는 동 떨어진 듯한 사람인 그가 좋아지는 것을 어쩐지 참을 수 없어서, 그래서… 아르티옴은 항상 제이 말에 최선을 다해 청개구리가 되고는 했다.
그와 자신이 같은 편이 되지 않길 바랐다. 그런 것까지 마음이 맞는 순간이면 아, 아르티옴을 ...
그를 향한 애욕을 감출 수 없을 테니까.
눈 앞의 두 남자는 어느새 서로의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결론이 난 모양이었다.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아르티옴은 문득 제이가 그리워 서글퍼졌다. 하지만 충돌이 두려워 떠난 것은 자신이다.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대화는 끝났고 저들은 아마 학교로 향하겠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
아르티옴이 짧게 말하자 둘은 맞은편의 샛길을 가르켰다.
”가다 보면 보일 거야.“
벌써 해가 지려고 했다.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었다. 기다리는 것이 있을까. 기다릴 수록 불확실성은 증감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당장 들어가기엔 다시 염려가 된다. 아까같은 천운이 따라 줄 리 없다. 해가 지기 전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도착해 은신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르티옴은 몸을 돌려 첫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이었다. 으윽, 아르티옴이 신음했다.
옆구리에 찢어질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뭐야, 할 새도 없었다. 둘 중 한 녀석이 나이프를 찔러 넣은 모양이었다. 자리에 주저 앉은 아르티옴, 바닥에 힘 없이 떨어진 가방을 나머지 녀석이 주워들었다.
"병신아, 어느 세월에 거기까지 가겠어. 당장 굶어 뒤지겠는데."
상스럽게 내뱉으며 아르티옴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대충 포장했던 식재료 몇 개가 그들의 손아귀 위로 올라갔다. 죽을 것 같이 아팠다. 숨이 쉬어지지도 않고, 슬쩍 바라본 쪽에서 자꾸만 피가 흘러 나왔다. 아, 진짜 미친듯이 아프다. 음식을 옮기느라 여념이 없는 녀석들을 응시하다가, 아르티옴은 그의 옆구리에 어느새 무방비하게 걸려 있는 총구를 빼내들었다. 상처 탓에 고통스러웠지만 분노가 앞섰다.
"이 미친새끼들아, 알려 줬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어느새 총구를 한 녀석의 목구멍에 들여다 대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즉각 반격해 올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르티옴의 얼굴 역시 출혈 탓에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총구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았다.
감히 나를 배신해. 나는 다 도와 줬는데. 너희들은 뭐야. 나는 너희들을 치지도 때리지도 않았어. 근데 왜 도와준 나까지 제압하려고 하는데. 분노와 충동성은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한 순간의 불꽃이 아르티옴에게 지펴진 순간, 그는 앞 뒤를 가릴 수 없었다. 처음 만져 보는 차가운 총, 이질감을 느끼며 철컥,
탕.
어떤 총성은 경기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은 순식간에 살벌히도 울려퍼져 아르티옴의 순정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
"야, 이 바보야. 아르티옴..."
어떤 사랑은, 그런 순간 시작되기도 한다.
"아... 씨발."
두 사람의 곁에 좀비들이 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옆구리에 찌르는 통증은 여전했지만, 아르티옴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총구를 여전히 쳐들고 있었다. 이를 테면 올 거면 와 보라는 듯이. 그것을 지켜보는 제이의 표정이 조금은 들뜬 것 같았다. 묘하게도.
처음으로 체육 창고가 아닌 곳에서 맞는 밤. 주거촌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좁은 경비 사무실 안에서 두 사람은 문을 잠그고, 가구들로 입구를 막은 채 더 협소해진 공간 안에서 두 몸을 간신히 누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홀로 맞는 밤 같은 것은 찾아오지 않았다. 제아무리 아르티옴이 도망친대도.
제이는 아르티옴을 발견하자마자 그의 손부터 잡았다. 총구를 쥔 손을. 그리고 그것을 앗아갔다. 순식간에 숨이 끊어진 동료를 지켜보던 건달은 식량을 챙기지도 않고 도망갔고, 제이는 한 마디 이렇게 내뱉었다.
"이런 건 소리가 너무 크잖아. 아르티옴."
다시금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 이제는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아르티옴은 이런 것을 기다려 온 것 같다. 빠르게 몰려드는 좀비들을 지켜보며 제이가 어깨에 둘러 멘 삽을 앞으로 꺼내들었다. 좀비가 몇 마리 그에게 엉겨붙었는데, 오전의 전투로 힘이 빠진 제이가 절그렁 소리를 내며 삽을 떨어뜨리자 즉각 주워들은 것은 아르티옴이었다. 그는 한에 맺혔던 것처럼 제이 주변의 좀비들을 거세게 내려쳤다. 얼마 안 되어 결박이 풀리고, 제이가 마지막 좀비까지 쓰러뜨렸을 무렵, 아르티옴은 눈물짓고 있었다.
"아파서 그래."
제이는 더 묻지 않고 커다란 손을 아르티옴의 옆구리에 댔다. 자꾸 흐르는 피는 자신의 웃옷을 조금 찢어 지혈했다. 학교를 벗어난 순간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경비 사무실까지 도착해 그래도 두 사람이 함께 맞는 밤은, 최악의 시나리오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하루도 안 되어 둘은 다시 함께였다.
"내일은 더 들어가 볼 거야?"
경비 사무실은 불이 들어오지 않은 채였다. 일리 묵었던 사람이 있는지 비린내도 났다. 어두컴컴한 내부였지만 제이는 아르티옴의 손을 붙잡고 있었고 아르티옴은 늘 그렇듯 내치지 않았다. 제이의 음성에 아르티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제이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아르티옴이 물었다.
"같이 있어 줄 거야?"
제이는 되려 물었다.
"찔린 건 괜찮아?"
"어. ... 나 보고 보송하다던데. 넌 어쩌다가 그렇게 먼지투성이가 됐냐."
그 말에 제이가 한참을 조용했다. 답지 않게.
"아르티옴. "
"왜."
왜 뜸을 들여. 멍청하게.
제이가 겨우 한 마디 했다.
"나 물렸어."
어떤 사랑은 끝에서야 시작되는 법이다.
아침이 밝자 아르티옴은 무게를 느꼈다. 뭔가가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눈을 떠 보니 제이가 바보 같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잠에 들어 있었다. 떨어뜨리려고 몸을 몇 번 움찔거렸지만 옆구리 쪽으로 제이의 팔이 튀니 통증이 느껴져서 몰래 윽, ... 하고 신음했다. 그리곤 제이가 눈을 뜰 때까지 얌전히 머물렀다.
제이는 정말 물렸을까. 제이 심슨, 이 바보 같고 입만 산 양반. 늘 호기롭게 의견을 펼치지만 정작 제대로 된 고백은 않는 이. 아르티옴은 내심 기다린다. 그가 물어주기를.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혹은 자기를 좋아하기라도 하는지. 묻지 않으니 답해줄 수 없고, 답할 수 없으니 자신도 알 수 없다. 제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제이가 돌아온 순간, 아르티옴은 내심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찾아가고 싶었던 것은 자신을 원하는 사람, 그로부터 오는 안정감. 그러면 제이는 얼마나 더 오래 제 곁에 있어 줄 수 있을까.
제이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도 몇 십분이 지난 후였다. 자신이 아르티옴을 안고 있고, 아르티옴이 가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팔을 꺼내 아르티옴의 고개를 제 팔 위에 가져다 댔다. 다시금 코가 닿을 정도로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제이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찢어지는 게 낫겠지…"
"왜. "
놀리듯 제이가 대답한다.
"더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가야지이. 나는 네가 같이 있어달라고 하면, 그때마다 좋다고 해버릴 것 같으니까아."
돌려받은 말에 억하심정이 든 아르티옴은 괜히 돌아 누웠다. 고작 자신이 잠시 곁을 비웠다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갈 거야?"
"그래, 가야지."
"야, 제이."
"왜..."
"가지 마."
"내 말은 들어준 적 없으면서어."
그렇게 말하는 제이는 웃고 있다. 동시에 아르티옴의 손에 제 손의 깍지를 낀 채, 살짝 미소짓는다. 가까이서 본 제이의 얼굴은 많이 탔고, 흙투성이에다가, 그러나 여전히 몹시 잘생겼다.
"아르티옴. 나는 네가 나랑 있어주길 바랐어. 나라고 그리운 게 없던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어."
"..."
"같이 오래 지내다가 모든 일이 괜찮아진 날, 묻고 싶었어어.
이제는 도망칠 이유도 없지만, 같이 있을 이유도 없는데. 그래도 같이 있어주겠냐고."
"...제이, 미친새끼야. 진작 말하지 그랬어.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무엇인가 말하려던 아르티옴의 입술에 제이의 입술이 닿는 바람에 잠시 끊어졌다.
"돌아올게. "
"언제?"
"제정신인 나는 언제나 너랑 있고 싶어했으니까, 제정신이 들면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누군가에겐 참으로 미련하고 바보 같은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 제이는 안심하고 있었다. 이제 좀비를 처치할 수 있게 된 아르티옴은 제 몸은 건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제이는 삽도 총도 식량도, 무엇도 챙기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말 없이 사라지던 아르티옴과는 다르게 제이는 나름대로 씩씩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제이는 결단이 빠른 자식이었다. 언제나 내키는 대로 굴어 왔다. 갑작스레 아르티옴의 뺨을 어루만지며 남사스럽게 예쁘다는 말을 하질 않나, 난생 어울리지도 않는 파티에 초대하질 않나, 함께 손을 쥐고 있으면 아르티옴은 항상 자신이 알던 모습과 다른 사람이 되고는 했다. 제이의 결단에는 항상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티옴이 말릴 새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함께 몸을 일으킨 아르티옴은 멍하니 제이를 응시했다. 떠날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그가 옆에 있기를 희망할 때 그는 이리 떠난다. 같이 있어달라고 하고 싶다. 좀비가 된 채로라도 함께 있어달라고. 하지만 제이는 번복하는 법이 없다.
"내일까지만이라도 같이 있어."
떨리는 음성으로 아르티옴이 한마디 하자 제이는 호쾌하게 웃어 보인다.
"도중에 변해버릴걸. 너 좀비 싫어하잖아. 쟤네처럼 못생긴 꼴 보여주기 싫은거얼. "
예전에 네가 그랬던 것처럼, 추레한 꼴을 왜 보여주기 싫은지 알 것 같아.
제이라고 무서움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믿는다. 모든 것이 전처럼 좋아질 거라는 사실을. 치료제 등의 것이 개발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멀끔한 얼굴을 되찾아,아르티옴을 볼 수 있으리라고.
질문은 미뤄서 그 때 물어봐야겠다.
이제 다 끝났는데. 또 도망칠 거야. 아르티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알고 싶은데에. 알려주면 안 될까.
물어볼 수 있겠지.
이건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닐 테니까.
마지막으로 제이는 아르티옴을 강하게 포옹했다. 아르티옴은 이번에도 밀쳐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고, 제이의 뒷목에 깍지를 끼고 짧게 입을 맞췄다. 떨어진 뒤의 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 길었다. 제이는 놀란 얼굴로 몇 초를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내서 웃어버렸다. 그리고 아르티옴의 뺨 위에 제 손을 대고 가볍게 쓸었다. 먼지가 말라붙어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제이."
"왜."
제이의 손가락의 촉감을 그대로 느끼는 채로, 아르티옴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들릴 듯 말듯한 가삿말, 이것은 집에서 자주 연주하던 기타 곡.
"기억해."
"...이거..."
"기타로 들려 줄 날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어디에서든 널 기다릴 거야."
그러면서 손으로는 인사를 했다. 제이는 그것을 가만 지켜보더니,
곡을 감상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가,
충분한 시간이 지나자 가볍게 목례를 했다.
흥얼거림은 멎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걸음도.
소리가 작아지고,
제이는 멀어지고,
돌아오는 발자국도 찍히겠지. 이건 아마,
아무래도,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닐 테니까.